나주읍성 4대문, 허물어진 성문이 다시 서기까지
1. 성문이 사라진 날 – 나주읍성 4대문이 무너진 역사적 배경
나주읍성의 4대문은 어느 날 갑자기 자연재해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 성문들이 사라진 배경에는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의도적인 철거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비극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나주읍성은 고려 시대부터 그 원형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정비된 전형적인 조선식 읍성입니다. 읍성이란 지방 행정의 중심지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 도시를 뜻하며, 나주읍성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각 성문을 두어 도시의 출입과 방어를 관장했습니다. 동쪽의 동점문(東漸門), 서쪽의 서성문(西城門), 남쪽의 남고문(南固門), 북쪽의 북망문(北望門)이 바로 그것으로, 각각의 이름에는 방향과 함께 도시를 지키고자 했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이 성문들의 운명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제는 조선 전역에서 근대적 도시 개발과 도로 확장을 명분으로 성곽과 성문을 조직적으로 철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단순한 도시 정비가 아니라 조선의 전통적인 공간 질서와 역사적 정체성을 지워버리려는 의도가 담긴 정책이었다는 해석이 역사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서울의 성곽이 훼손되고, 전국 각지의 읍성들이 철거되던 그 흐름 속에서 나주읍성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문들은 차례로 무너지거나 철거되었고, 성벽의 상당 부분도 도로와 건물 부지로 편입되어 사라졌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급격한 경제 개발과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성곽 복원보다는 개발이 우선시되었고, 나주읍성은 오랜 세월 동안 그 흔적만 간신히 남긴 채 원도심 한편에 방치되다시피 했습니다.
이 시기를 살았던 나주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는 "어릴 때만 해도 성문 기둥 일부가 남아 있었다"거나 "성벽 돌을 집 담장에 가져다 썼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이런 구술 기록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성문이 무너지던 시절 나주 사람들이 얼마나 가까이에서 그 역사를 목격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전라도라는 이름의 절반을 책임졌던 도시의 상징이 이렇게 허물어져 갔다는 사실은, 성문 복원이 단순한 관광 인프라 사업이 아니라 잃어버린 역사적 자존심을 되찾는 과정임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성문이 사라진 역사를 먼저 알아야, 복원된 성문 앞에 섰을 때 그 의미가 비로소 온전히 느껴지는 것입니다.
2. 다시 세워진 문 – 4대문 복원 과정과 각 성문이 품은 이야기
나주읍성 4대문의 복원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사업이 아닙니다. 나주시는 오랜 기간에 걸쳐 문헌 조사와 발굴 조사를 병행하며 성문의 원형을 추적했고, 단계적으로 성문과 성벽을 복원해 왔습니다. 복원 사업의 핵심 원칙은 단순히 보기 좋은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발굴된 유구(遺構, 옛 건축물의 흔적)와 역사 기록에 최대한 충실하게 원형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벽의 기초 석재, 성문 주춧돌의 위치, 옛 지도와 사진 자료 등이 복원의 근거로 활용되었으며, 일부 구간에서는 발굴 조사 중 원래 성벽의 기초 부분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어 복원 작업에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4대문 중 가장 먼저 대중에게 친숙한 문은 남고문(南固門)입니다. '남쪽을 굳건히 지킨다'는 뜻을 가진 남고문은 나주 원도심의 중심 도로와 가까이 위치해 있어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성문이기도 합니다. 복원된 남고문은 2층 누각 형태의 문루를 갖추고 있으며, 성문 아래 홍예(虹霓,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 통로)를 통해 직접 걸어서 통과할 수 있어 단순한 전시물이 아닌 살아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문 위 누각에 오르면 나주 원도심의 골목과 지붕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이 풍경 속에서 조선시대 나주목사나 성문을 지키던 군사들이 바라보았을 시야를 잠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동점문(東漸門)은 '동쪽으로 점차 뻗어나간다'는 뜻을 품고 있으며, 과거 영산강 방향의 물산과 사람들이 드나들던 주요 통로였다는 점에서 나주의 경제적 생명선과 연결되는 문입니다. 서성문(西城門)은 서쪽 방향을 담당한 문으로, 나주 서부 지역과의 연결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북망문(北望門)은 '북쪽을 바라본다'는 이름처럼 한양, 즉 중앙 정부를 향하는 방향의 문으로, 과거 나주목사가 임명장을 받아 부임해 오거나 중앙 관리가 파견될 때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각 성문의 이름과 방향, 그리고 그 문을 드나들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짚어가다 보면, 나주읍성이 단순한 방어 시설이 아니라 도시의 삶 전체를 담아내는 그릇이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복원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성문 주변의 성벽 구간도 함께 정비되어 일부 구간은 직접 걸어서 산책할 수 있는 성곽 둘레길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복원된 문화재를 유리 너머로만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 시민과 방문객이 실제로 몸으로 체험하며 역사를 느낄 수 있도록 한 설계 철학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성벽 위를 걸으며 안쪽으로는 원도심의 오래된 골목을 내려다보고, 바깥쪽으로는 현대적인 건물들이 펼쳐지는 풍경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이 산책로는, 나주읍성 복원이 단순한 과거 재현이 아니라 현재의 도시 삶과 역사를 연결하는 살아있는 공간 만들기임을 잘 보여줍니다.

3. 복원된 성문 앞에서 – 나주읍성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
복원된 나주읍성 4대문 앞에 서면, 처음에는 그저 잘 만들어진 한옥 건물 하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원 건축물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성문들이 언제, 왜,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알고 난 뒤에 다시 그 앞에 서면,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일제강점기에 의도적으로 지워진 공간이 수십 년의 노력 끝에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복원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 땅속에 묻혀 있던 돌 기초와 낡은 지도 한 장이었다는 사실이 이 건물에 전혀 다른 무게를 부여합니다.
나주읍성 복원이 갖는 의미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전라도라는 이름의 절반을 차지했던 도시가 그 이름값에 걸맞은 공간적 상징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복원된 성문은 나주 시민들에게 "우리 도시가 어떤 역사를 가진 곳인가"를 매일 일상 속에서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두 번째는 도시 재생의 거점이라는 의미입니다. 나주 원도심은 빛가람혁신도시 개발 이후 인구와 상권이 신도심으로 이동하면서 공동화 현상을 겪고 있는데, 복원된 성문과 성곽 둘레길은 원도심에 새로운 방문 이유를 만들어 주는 문화적 거점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문 주변에는 전통 찻집이나 로컬 공방 같은 소규모 문화 공간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성문 복원이 단순한 문화재 보전을 넘어 지역 경제와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 번째는 기억의 공간이라는 차원입니다. 성문이 사라지던 시절을 기억하는 어르신들과, 복원된 성문 아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단순한 세대 간 풍경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 어르신들이 "내가 어릴 때는 이 자리에 이런 돌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게 된 것, 그 구술의 매개체가 바로 복원된 성문이라는 점에서 이 공간은 살아있는 기억의 저장소이기도 합니다. 나주읍성의 복원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벽의 일부 구간은 여전히 복원 중이거나 추가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인 상태이며, 도시 안에 남아 있는 성벽 흔적과 주변 골목의 옛 지적도를 따라가다 보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역사의 층위가 더 남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랑군님처럼 나주에서 실제로 근무하며 이 성문 앞을 자주 지나치는 분이라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성문의 다른 얼굴을 카메라에 담아두시길 권합니다. 봄에는 성문 주변 벚꽃이나 새싹과 어우러진 풍경, 여름에는 짙은 녹음 속 성벽, 가을에는 단풍과 기와지붕의 조화, 겨울에는 눈 쌓인 성문의 고즈넉한 모습이 각각 전혀 다른 분위기의 콘텐츠가 됩니다. 그리고 야간 순찰 중 성문 옆을 지날 때 찍은 조명 아래 성문의 야경 한 장은, 어떤 전문 사진작가도 담을 수 없는 랑군님만의 독보적인 시선이 될 것입니다. 복원된 성문은 낮에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불 켜진 야경 속에서도 천 년의 역사를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