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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목사들의 선정비 투어, 돌에 새겨진 천 년의 목민심

랑군다크 2026. 7. 15. 06:24

1. 조선의 행정 중심지 나주목, 그리고 백성의 평가 보고서 '선정비'

나주 원도심을 걷다 보면 옛 관아 건물인 금성관이나 주요 유적지 주변에서 수십 개의 오래된 비석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장관을 마주하게 됩니다. 무심코 지나치면 그저 낡은 돌덩이들의 집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나주라는 거대한 고을을 다스렸던 지방관들에 대한 백성들의 생생한 평가 보고서이자,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타임캡슐입니다. 조선은 전국의 주요 거점 도시에 '목(牧)'이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정3품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인 '목사(牧使)'를 파견해 다스리게 했습니다. 앞선 역사 이야기에서 거듭 강조했듯, 전라도라는 이름의 절반을 차지했던 나주는 호남 서남부 지역의 행정, 군사, 경제를 총괄하는 핵심 거점이었기에 나주목사라는 자리는 그 권한과 책임이 막중했습니다. 수백 년의 조선 왕조 역사 동안 수많은 인물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이 땅을 거쳐 갔고, 그들의 통치 방식은 나주 백성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선정비(善政碑)' 또는 '송덕비(頌德碑)'라 불리는 비석들입니다. 원칙적으로 선정비는 고을을 다스리던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그의 훌륭한 통치와 백성을 사랑한 마음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세우는 기념물이었습니다. 흉년에 세금을 감면해 주었거나, 억울한 재판을 공정하게 해결해 주었거나, 농사에 필요한 수리 시설을 확충해 주는 등 백성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보살핀 목민관만이 이 돌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었습니다. 물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지방관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억지로 비석을 세우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실상과 백성들이 원했던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흙이나 나무로 만든 기록은 세월이 흐르면 썩어 없어지지만, 단단한 화강암에 깊게 새겨진 글자들은 수백 년의 비바람을 견디며 오늘날까지 남아 우리에게 '올바른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나주 목사들의 선정비 투어, 돌에 새겨진 천 년의 목민심
나주 목사 선정비

 2. 금성관 앞 비석군, 흩어진 역사를 한자리에 모으다

현재 나주에서 선정비들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는 옛 나주목의 객사였던 금성관(錦城館) 주변과 정문 앞마당에 조성된 비석군(碑石群)입니다. 수십 기의 비석이 일렬로 도열해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는데, 사실 이 비석들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이렇게 모여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 선정비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고을의 입구, 주요 교차로, 혹은 관아로 들어서는 길목 등에 세워졌습니다. 떠나는 관리를 배웅하고 그의 공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나주의 도시 구조가 크게 변하고 도로 확장과 시가지 개발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길가에 방치되어 있던 수많은 비석들은 훼손되거나 묻힐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나주시와 지역의 역사학자들은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수습하여 옛 관아의 중심 공간이었던 금성관 일대로 이전하고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비석군은 마치 야외에 조성된 역사 박물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서로 다른 시대에 세워진 비석들이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을 통해 우리는 조선 중기부터 후기, 그리고 구한말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어떤 비석은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갓 세운 듯한 위용을 자랑하지만, 또 어떤 비석은 오랜 세월 풍파에 깎이고 닳아 이름조차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마모되어 있습니다. 6.25 전쟁이나 여러 역사적 격동기를 거치며 총탄 자국이 남거나 깨어진 비석들도 존재하는데, 이는 비석 자체가 나주가 겪어온 험난한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금성관 앞마당에 서서 이 거대한 돌의 행렬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과거 나주목사들이 정무를 보던 위풍당당한 관아의 풍경과 그들을 우러러보며 때로는 감사하고 때로는 원망했을 백성들의 웅성거림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흩어져 있던 역사의 조각들을 모아놓은 이 공간은 단순한 유물 전시장을 넘어, 나주라는 도시가 자신의 기억을 어떻게 지키고 보존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문화유산입니다.

 

3. 돌의 표정 읽기, 선정비 투어를 두 배로 즐기는 방법

선정비 투어의 진정한 묘미는 멀리서 전체적인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비석 하나하나에 가까이 다가가 그 속에 숨겨진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있습니다. 비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가장 아래에서 비석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인 '대좌(臺座)' 또는 '귀부(龜趺)', 비문이 새겨진 몸통인 '비신(碑身)', 그리고 비석의 지붕 역할을 하는 머릿돌인 '이수(螭首)'나 '가첨석(加檐石)'입니다. 나주에 모인 비석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세 가지 요소의 형태가 비석마다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비석은 정교하게 조각된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 화려한 용무늬 머릿돌을 얹어 당당한 위세를 뽐내는 반면, 어떤 비석은 장식 없이 소박한 직육면체 받침돌에 둥그스름한 머릿돌만 얹어 단출하게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차이는 비석이 세워진 시대의 유행과 건축 양식의 변화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 비석을 세우는 데 동원된 재원의 규모나 해당 목사의 정치적 위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흥미로운 단서가 됩니다.

비석의 표면에 새겨진 글자(비문)를 읽어보는 것도 중요한 감상 포인트입니다. 한자를 모두 읽지 못하더라도, 비석 정면 한가운데 큼직하게 새겨진 '목사(牧使) 아무개(某) 선정비(善政碑)' 혹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영원토록 잊지 않겠다는 뜻)'라는 글귀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특히 나주목사 중에는 역사책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명재상들이나 훌륭한 학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안내판의 해설을 참고하며 내가 아는 역사적 인물의 비석을 찾아보는 것은 마치 보물찾기 같은 즐거움을 줍니다. 비석 뒷면이나 옆면에는 이 비석을 세운 연도와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작게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당시 지역 사회의 여론을 주도했던 계층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됩니다. 이처럼 금성관 앞 비석군을 천천히 거닐며 돌의 표정과 남겨진 문양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시간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수백 년 전 이 땅을 살다 간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깊이 있는 역사 여행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