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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무너지지 않은 성, 나주가 동학농민운동에 남긴 이름

랑군다크 2026. 7. 15. 12:32

1. 1894년 호남을 뒤덮은 불길 – 동학농민운동과 나주가 처한 위치

1894년, 조선 전역을 뒤흔든 거대한 민중의 물결이 호남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탐관오리의 수탈과 외세의 침탈에 지친 농민들이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동학의 가르침 아래 하나로 뭉쳐 봉기한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지역 반란을 넘어 조선 봉건 체제 전체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전라도 대부분의 고을이 차례로 농민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조선 조정은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결국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들어오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습니다.

이 격동의 한가운데서 전라도의 거의 모든 고을이 농민군에게 점령되거나 관아가 무력화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흐름 속에서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바로 나주성이었습니다. 전라도 서남부의 행정 중심지였던 나주는 동학농민운동 내내 농민군에게 끝내 함락되지 않은 유일한 고을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한가를 이해하려면 당시 나주가 가진 지리적·전략적 위상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나주는 영산강 수계를 중심으로 전라도 서남부의 물자와 세금이 집결되는 경제적 요충지였고, 목사가 파견되는 최고 등급의 지방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농민군 입장에서 나주를 장악하는 것은 단순히 고을 하나를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서남부 전체의 행정 기반과 물자 공급망을 손에 넣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반대로 나주를 지켜낸다는 것은 관군과 조선 조정 입장에서 전라도 내에 단 하나의 거점이라도 살아남아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처럼 나주성의 방어는 단순한 지방 수성전(守城戰)이 아니라 동학농민운동의 전체 흐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습니다.

나주성

 

2. 왜 나주만 버텼는가 – 민종렬 목사와 나주 수성의 전략적 배경

전라도의 수많은 고을 가운데 오직 나주만이 끝까지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당시 나주목사였던 민종렬(閔種烈)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민종렬은 농민군의 봉기 소식이 전해지자 즉각적으로 읍성 방어 체계를 강화하고 민병대를 조직해 성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성문을 닫고 농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주 지역의 향반(鄕班, 지방 유력 가문)과 보부상 조직 등을 적극적으로 규합해 수성군(守城軍)을 편성했습니다. 이 수성군은 농민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공세를 막아내며 나주성을 지켜냈고, 민종렬은 이 공로로 훗날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민종렬의 정확한 재임 기간, 수성군 편성의 구체적인 경위, 교전 횟수와 날짜 등은 자료마다 표기가 다를 수 있으니,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나 나주시 공식 자료로 반드시 재확인하신 뒤 기재하시길 권해 드립니다.

나주성이 버틸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인은 지형적 조건입니다. 나주읍성은 단순히 평지에 쌓은 성이 아니라, 금성산(錦城山)을 배후에 두고 영산강 지류의 물길을 자연 해자(垓字)로 활용하는 유리한 지형 위에 세워졌습니다. 성벽 자체도 오랜 세월에 걸쳐 증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성내에는 목사가 관할하는 관아와 무기고, 곡식 창고 등이 갖춰져 있어 장기 농성에 필요한 물자를 어느 정도 자급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세 번째 요인은 나주 지역 내부의 사회적 결속입니다. 나주는 고려 왕건과의 인연에서 시작해 조선 내내 지방 명문 가문들이 뿌리를 내려온 지역으로,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역 유력층의 결속력이 다른 고을에 비해 강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동학농민운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주성 방어전은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한 단면으로, 그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단순히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고 다양한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농민군의 봉기가 당대 민중의 절박한 외침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나주성 방어가 갖는 역사적 특수성을 함께 조명하는 균형 잡힌 서술이 이 주제를 다루는 가장 정직한 방식입니다.

 

3. 나주성이 오늘 우리에게 남긴 것 – 역사의 현장을 걷는다는 것의 의미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한 해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주화약 이후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내정 간섭 소식에 다시 봉기했고, 이 2차 봉기 과정에서 나주성은 더욱 치열한 공방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농민군은 나주성을 여러 차례 공략했지만 끝내 함락에 실패했고, 같은 시기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근대식 화력 앞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농민군은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전봉준이 체포되고 지도부가 무너지면서 동학농민운동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이 운동이 이후 항일 의병 운동과 3·1 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중 저항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는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나주성은 그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끝까지 관군의 거점으로 남았고, 이 사실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사료적 근거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나주읍성을 걷는 경험은 이 역사적 배경을 알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복원된 동점문이나 남고문 앞에 서서 그 성문을 바라보면, 단순히 잘 복원된 한옥 건물 하나가 아니라 1894년 수만 명의 농민군이 밀려오던 그 밤을 버텨낸 역사의 현장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성벽을 따라 걷는 둘레길 위에서는 "이 돌 하나하나가 그 시절 성을 지키던 사람들의 손을 거쳤겠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나주읍성이 동학농민운동의 전국적인 흐름 속에서도 끝까지 함락되지 않은 유일한 성이었다는 사실은, 이 성이 단순한 행정 시설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선택이 응축된 공간임을 말해줍니다. 승리한 쪽도 패배한 쪽도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오늘날 평온하게 복원된 성문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 조용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나주읍성을 걷는 것은 단순한 역사 탐방이 아니라, 그 시절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선택과 결과를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 여행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주의 거리 곳곳에는 그 시절의 기억이 돌담과 성벽, 비석과 나무 사이에 조용히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