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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소반(小盤), 목공예 장인의 명맥 1. 상을 차리는 문화에서 시작된 작은 밥상, 소반이란 무엇인가소반(小盤)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작은 상’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는 식탁과 의자를 사용하는 서양식 식사 문화가 보편화되었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소반을 꺼내 가족 수만큼 상을 따로 차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둘러앉기에 알맞은 크기의 나무 상, 그 아래에는 짧은 다리 네 개가 달려 있어 바닥에 내려놓고 사용하는 구조가 기본입니다. 식탁이 여러 사람이 함께 둘러앉아 쓰는 ‘공동의 공간’이라면, 소반은 각자의 밥그릇과 반찬을 올리는 ‘개인의 공간’에 가까웠습니다. 밥상 하나가 곧 그 사람만의 작은 세계였던 셈입니다.소반은 모양과 기능,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뉩.. 2026. 7. 16.
나주배, '신고' 너머의 토종 품종 이야기 1. 나주배라고 하면 다 같은 배일까 – 품종이라는 이름의 세계마트 과일 코너에서 '나주배'라고 적힌 상자를 집어 들면 그 안에는 대부분 둥글고 큼직한 황갈색 배가 담겨 있습니다. 이 배의 이름은 '신고(新高)'입니다. 나주배 하면 자동으로 신고 품종을 떠올릴 만큼, 신고는 오늘날 나주 배 생산량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 품종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주의 배 역사는 신고 한 품종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신고가 나주 배밭을 지배하기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신고 외의 다양한 품종들이 저마다의 맛과 향, 수확 시기를 가지고 나주의 땅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이 품종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단순히 '나주배'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였던 과일이 사실은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여러 존재.. 2026. 7. 16.
영산포 홍어, 뱃길이 만든 발효의 미학 1. 왜 하필 영산포인가 – 홍어 발효 문화의 지리적 뿌리홍어 하면 많은 사람들이 코를 찌르는 강렬한 암모니아 냄새와 혀가 얼얼해지는 독특한 맛을 먼저 떠올립니다. 전라도 음식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식재료이지만, 왜 하필 나주 영산포가 삭힌 홍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는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답은 영산강의 물길과 지리적 거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홍어의 주요 어획지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 일대입니다. 흑산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서해 외딴 섬으로, 이곳에서 잡힌 홍어를 뭍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초반까지만 해도 영산강은 서해 바다와 직접 연결되는 내륙 수운의 핵심 통로였습니다. 흑산도에서 출발한 배는 서해를 거쳐 영.. 2026. 7. 16.
나주곰탕, 맑은 국물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 1. 왜 나주곰탕은 맑은가 – 뽀얀 국물이 아닌 이유를 역사에서 찾다전국 어디서나 '곰탕'이라는 메뉴를 주문하면 대부분 진하고 뽀얀 국물이 나옵니다. 오랜 시간 사골과 잡뼈를 강한 불에 끓여내 콜라겐과 지방이 녹아든 그 탁한 백색 국물이 곰탕의 일반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나주에서 곰탕 한 그릇을 받아들면 예상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릇 안에 담긴 국물은 놀라울 만큼 맑고 투명하며, 그 속에 얇게 썬 양지와 수육이 단정하게 놓여 있습니다. 처음 접하는 이들은 "이게 정말 곰탕이 맞나?"라는 의문을 품을 만큼, 나주곰탕의 국물은 여느 곰탕과 확연히 다른 첫인상을 줍니다.이 맑은 국물의 비밀을 이해하려면 나주의 지리적·경제적 조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나주는 조선시대 내내.. 2026. 7. 15.
끝까지 무너지지 않은 성, 나주가 동학농민운동에 남긴 이름 1. 1894년 호남을 뒤덮은 불길 – 동학농민운동과 나주가 처한 위치1894년, 조선 전역을 뒤흔든 거대한 민중의 물결이 호남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탐관오리의 수탈과 외세의 침탈에 지친 농민들이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동학의 가르침 아래 하나로 뭉쳐 봉기한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지역 반란을 넘어 조선 봉건 체제 전체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전라도 대부분의 고을이 차례로 농민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조선 조정은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결국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들어오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졌.. 2026. 7. 15.
나주 목사들의 선정비 투어, 돌에 새겨진 천 년의 목민심 1. 조선의 행정 중심지 나주목, 그리고 백성의 평가 보고서 '선정비'나주 원도심을 걷다 보면 옛 관아 건물인 금성관이나 주요 유적지 주변에서 수십 개의 오래된 비석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장관을 마주하게 됩니다. 무심코 지나치면 그저 낡은 돌덩이들의 집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나주라는 거대한 고을을 다스렸던 지방관들에 대한 백성들의 생생한 평가 보고서이자,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타임캡슐입니다. 조선은 전국의 주요 거점 도시에 '목(牧)'이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정3품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인 '목사(牧使)'를 파견해 다스리게 했습니다. 앞선 역사 이야기에서 거듭 강조했듯, 전라도라는 이름의 절반을 차지했던 나주는 호남 서남부 지역의 행정, 군사, .. 2026. 7. 15.